독립선언 준비과정
각 종교계를 아우르는 민족대표가 모이다

3·1운동의 시초가 되는 독립선언에 대한 논의는 1918년 12월 천도교계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천도교주인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 교단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동의를 얻었다. 이를 전국적으로 펼치기 위해 천도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불교 등의 각종 종교계와 유림, 당시의 구한말 대신 등 명망 있는 원로들을 총 망라하여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구성한 이들을 조선 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내기로 계획하고 서명할 인사들을 찾기 시작했다. 1919년 2월 21일 최남선이 당시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높던 평북 정주의 이승훈을 만나 범교파 합동 독립운동을 제안하였다. 처음에는 교리 문제로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조선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합의를 이뤄냈다.

  •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김상규의 집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태화관

이에 24일 한용운이 불교계의 동참을 합의하여, 한용운과 백용성이 함께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또, 구한말의 대신들의 동참을 요청하러 만났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유림과도 접촉을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구성되었다.민족대표들이 분담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하다기독교와 천도교가 역할을 분담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우선 독립선언의 중심에 있는 독립선언서의 제작은 천도교 측이 담당하였다.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 측의 오세창이 총책임을 담당하고, 천도교 직영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이 실무를 담당했다. 이종일은 극비리에 2월 27일 독립선언서 2만 1천 장을 인쇄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의 총책임 아래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단 등이 그 조직을 이용하여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식을 3월 1일로 결정한 후, 2월 27일에 김상규의 집, 이필주의 집 등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이어 28일 밤에 손병희의 집에서 마지막으로 모인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했던 계획을 변경하여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탑골공원에는 젊은 학생들과 군중이 모여 있어 혹시 일경과 충돌하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민족대표들을 그린기록화 (천안 독립기념관 소장)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다

1919년 3월 1일, 29인(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불참)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일제 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렸으며, 종로서에서 보내온 경찰들에게 연행되었다. 차를 타고 경찰서로 이동하던 민족대표들은 만세 시위를 하는 시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들이 점화한 3·1독립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나아가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1920년 7월 20일 3·1독립선언 관련 최종 공판이 이루어졌다. 이날 상하이로 망명한 김병조를 제외한 32명의 민족대표가 재판을 받았으며 대부분 1년 6개월에서 3년의 실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중 양한묵은 수감 도중 서거하였고, 손병희는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병사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정춘수, 최린, 박희도 3인은 일제 말기에 변절하여 친일 행적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민족대표들은 독립운동을 지속하거나 종교지도자로서 활동하면서 마지막까지 일제에 항거하며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민족대표들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의 외관과 내부 모습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