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의 길
태화관 주변 독립선언 유적지 지도
  • 01 보성사터

    조계사의 뒤편에 위치하였던 보성사는 3·1운동 당시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입니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고, 그달 27일 이종일 사장이 주도하여 극비리에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의 인쇄를 완료하였습니다. 이때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승희에게 발각되었으나 이종일 사장은 손병희 선생에게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하여 위기를 넘겼습니다. 또한 인쇄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옮기던 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인쇄된 족보라 속여 무사히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2월 28일부터 미리 정한 표식을 갖고 오는 각 종단, 지역, 학생 연락책에게 배포되었습니다.

    보성사는 3·1운동이 한창이던 6월 28일, 일제의 방화로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당시 보성사 건물 옆에 있던 회화나무는 아직도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남아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 02 태화관터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은 요리점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전화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

    태화관 터는 본래 반정으로 왕위에 즉위하기 전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이후 안동 김씨 김홍근의 저택,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순화궁으로 그 중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는 이윤용·이완용 형제가 번갈아 차지해 살면서 나라를 팔아 먹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뒤 명원관 분점 태화관이 자리 잡으면서 3·1운동을 맞았고, 이후 감리교회에서 구입하여 태화여자관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이 자리에 세워져 있는 태화빌딩은 태화기독사회복지관의 회관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 03 승동교회

    승동교회는 연희전문 출신의 학생단 대표 김원벽이 다녔던 교회로, 3·1운동 준비과정에서 1919년 2월 20일 학생단 제1회 간부회를 영러 조직체계를 정비한 곳이다. 2월 28일에는 제4회 학생단 간부회가 열려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이튿날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놓았다.

    승동교회는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사물엘무어가 지금의 롯데홀텔 부근 곤당골에 세운 교회에서 비롯되었으며, 1905년 종로 피마골 뒤편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승동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교회는 대가집 소실들과 장인, 백정들이 모여들어 '첩장교회'란 별명이 붙은 당시의 대표적인 민중교회였다.

  • 04 천도교중앙대교당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18년 12월 개기식을 하고, 1919년 2월 준공한 건물이다. 대지 1,824평, 건평 212평이며, 화강석 기초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단층구조로 중간에 기둥이 없이 천정을 철근 앵글로 엮고 지붕을 덮었다.

    전면에 2층 구조의 사무시을 붙여 짓고 현관부를 바로크풍 탑 모양으로 높이 쌓아 올린 이 건물은 일제하 서울의 3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조선 사람의 힘만으로 지은 것 중에서 가장 큰 건물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였다.

    수용 인원은 800명에서 1,000명 정도린데, 일제하 천도교의 종교집회뿐 아니라 조선물산장려회 강연회를 비롯 각종 집회가 열러 종로 YMCA회관과 더불어 조선 민중의 민의를 대변하는 공간으로 각광을 받았다.

  • 05 탑골공원

    3·1운동 전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사전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독립선언식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사실을 확인한 학생 대표들은 태화관을 항의 방문한 뒤 당초 예정했던 탑골공원에서 3월 1일 오후 2시 같은 시각에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학생대표가 공원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서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이 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의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의 거족적인 독립만세 시위는 이렇게 탑골공원에서 점화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0층 석탑이 있어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탑골공원은 본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대한제국기에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3·1운동의 발화지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 06 중앙고숙직실

    1926년 6월 10일 중앙고보생 30~40명은 8시 30분경 손종의 국장행렬이 단성사 앞에 이르자 이선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천여 매를 살포하면서 6·10만세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이밖에 '통동계'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중앙고보생 박용철과 이동환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표하는 등 6·10만세운동 과정에서 중앙고보 학생들이 펼친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이 일로 중앙고보 학생 43명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그 중 6명이 수감되었다.

  • 07 보신각

    종로 보신각 앞은 1919년 3월 1일 시위 군중들의 타종을 시작으로 서울지역 3·1독립만세시위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었다. 학생단 주도로 3월 5일에 열린 제2차 대규모 시위에서는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던 시위대가 정오경 이곳에 모여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3월 9일부터 상인들의 동맹철시가 단행될 때도 그 중심지가 되었다.

    4월 23일에는 임시정부(‘한성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국민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비록 당초 계획했던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무산되고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선포문]을 뿌리고, ‘국민대회 공화만세’라는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데 그쳤지만, 이날 국내 ‘13도 대표’ 25명의 명의로 배포된 ‘한성정부’ 선포 문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이 종소리와 함께 울려퍼진 보신각은 현재 새해맞이 타종행사가 매 해마다 열리고 있으며, 매 해 3·1절과 8·15광복절에도 타종행사를 하고 있다.

  • 08 유심사터

    유심사는 3·1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의 머무르며 불교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곳으로, 불교게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다.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의 독립운동 일원화가 성사되자, 최린은 계동 유심사로 한용운을 찾아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불교계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이후 한용운은 합천 해인사 출신 승려로 서울 대각사에 머무던 백상규를 불교계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한편, 2월 28일 밤 중앙 학림 학생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 오택언, 김법린, 박민오 등을 유심사로 불러 각처에 배포할 독립 선언서 3천매를 전달하였다.

  • 09 대각사

    창덕궁 후원 앞 방향에 위치한 대각사는 재단법인 대각회의 사찰로서, 1911년 용성 진종 대종사가 창건하였다. 창건 이후 용성 스님의 대각교는 이곳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독립운동의 본거지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대각사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대각교는 재산을 억지로 신탁을 하게 되는 등 수난을 겪다가 결국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러나 폐지 이후에도 대각사와 만주 간도 포교당을 중심으로 대각교둔동은 꾸준히 전개되었다.

    해방 후에는 임정 요인들의 귀국봉영회가 마련되기도 했다.

    현재 건물은 1986년 지상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새롭게 다시 지어졌으며, 지금까지도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셨던 용성스님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오고 있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