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로 보는 3·1운동

- 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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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 하순 권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계에서 독립 선언 논의 시작
-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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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에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
- 상순 동경 유학 중이던 송계백이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을 방문, 2·8 독립선언 계획 전달
- 20일 천도교주 손병희, 교단의 독립운동에 동의
- 28일 기독교계 학생들의 '학생청년단', 관수동 회의에서 청년 주도의 독립선언에 합의
- 2월
- 1일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신채호 등의 항일 독립운동가 39명 '무오독립선언"
- 8일 동경에서 조선 재일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 발표
- 11일 장로교인 이승훈과 천도교 간부들 회합. 독립운동 합작 합의
- 12일 세브란스의전 구내 이갑성 집에서 전문학교 학생들이 독립선언 계획
- 20일 박희도 집에서 장로교 감리교 대표들이 모여 개신교계 중심의 독립운동 논의
승동교회에서 '전문학교 학생 간부회의' 개최, 독자적인 운동 계획 수립 - 21일 최남선이 이승훈을 방문하여 범교파 합동 독립운동 제안
- 22일 함태영과 이승훈이 최린을 방문하여 '비폭력 독립선언'으로 할 것에 합의
- 24일 기독교와 불교계의 참여가 확정됨으로써 천도교를 포함한 민족대표 33인 결정
기독교와 천도교 역할 분담 원칙 확정/ 최린과 한용운, 불교계 동참에 합의 - 25일 학생대표 연합전선 참가 결정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학생 대표 회합. 운동 계획 확정 - 27일 천도교 운영 보성사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 21,000매 인쇄
- 28일 독립선언서 배포
- 3월
- 1일 오후2시 민족대표, 태화관에서 선언식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서 낭독하고 만세운동 시작, 수 십만 명의 시민들이 만세운동 동참함.
시위 군중, 시내 각처로 확산
종로-광교-경성부청 앞-남대문-의주통-프랑스영사관
종로-기념비전-대한문 앞-구리개-미국영사관/경복궁
종로-소공동-진고개-총독부 방면
밤 7시경 도심부 집회 종료. 서울 외곽으로 시위 확산 - 2일 서울 거리 전역에서 시위 전개. 학생, 노동자 400여 명 종로경찰서로 행진
- 3일 고종 국장일
평안남도 사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남. 73명 사망. 헌병 2명 타살. - 4일 서울 시내 도처에 격문 부착.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에서 약3,000명의 군중들이 만세 시위를 벌임. 수십 명 학살. - 5일 1만 명 이상 참여 대규모 시위.
- 남대문정거장-조선은행-종로
- 남대문정거장-남대문-태평통-남대문-대한문-황금정 1정목-종로
→보신각 앞에서 유혈사태. 75명 연행.
군산에서 김병수 주도로 500여 명이 시위.
이후 28차례에 걸쳐 시민 3만명이 참가.
53명 사망, 72명 실종 195명이 부상 - 6일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점차 수천 명 만세 시위, 시위군중 100여 명 중 50여 명을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케 함.
- 8일 용산 조선총독부 인쇄소 노동자 시위.
대구 신명학교,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등 학생과 서문 시장 상인과 주민등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만세를 외침. - 9일 전기회사 차장과 운전수 파업. 동아연초회사 직공 시위
- 11일 종로 상가 전면 철시 단행.
- 13일 만주 용정에서 3만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임.
- 16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 승려들이 모여 벌인 시위로 1 만여 명이 참여.
22일에는 상백, 배산, 가회, 삼가 등 다섯면의 주민 3만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 42명 사망, 100여명 부상.
같은 날 초계면에서 유림과 학생들 주도로 8천 명이 시위. 5명 사망, 수십명 부상 - 22일 봉래동 노동자 시위.
- 26일 시내 20여 곳에서 산발적 시위.
- 27일 용산 철도공장 노동자 파업 시위.
- 3월 28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마산 창원 일대에서 연합 대시위가 벌어짐.
- 4월
-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비밀 회합,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선포 결정.
- 3일 제2차 의거에서 3천 명이 시위. 5명이 사살 11명 부상
-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약 3,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임. 김구응 등 19명 사망.
유관순 등 많은 참가자들 부상, 투옥. - 3일 남원군 덕과면장이었던 이석기가 식수기념일로 예정된 4월 3일 군중 800명과 19개 면장 등이 시위를 벌임.
다음날 남원장터와 광한루 앞에서 수천 명의 싱위로 확대 됨. 9명이 사망, 10여 명 중상, 20여 명 체포. -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군산 여명학교 교사 문용기 등이 주동하여 만세운동 일어남.
- 11일 수원 우정면 화수리에서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일본 순사 1명을 타살하자 11일 새벽에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수집 명 학살.
평안도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의 만세 시위에 체포된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60여 명을 총살. - 15일 제암리의 교회에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모아 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을 학살.
- 23일 서린동 봉춘관에서 전국 13도 대표 25인 국민대회 개최.
- '국민대회 취지서', '선포문', '임시정부 약법' 제정
보신각,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앞에서 임시정부 선포를 알리는 시위 : UP통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짐.
- 9월
- 13일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실현.
- 국외의 만세시위
- 서간도 3월 12일, 북간도 3월 13일, 후춘지방 3월 20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