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기미년 3월 1일 / 박래원

일경이 휘두르는 총칼에 애국 학생 수십 명이 땅에 쓰러져

※ 《신인간》 1975년 3월호(통권 325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기미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금년 들어 벌써 56년째. 이제 그때의 감격을 되새기려니까 오직 감회가 깊을 뿐이다. 당시 나는 보성학교에 다니는 18세의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1일, 남산공원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당시 일본군이 남산공원에 대포를 걸어 놓고 매일 대포를 쏘아 정오를 알렸는데 이것을 오포라고 했다.) 소리가 “꽝!” 하고 서울의 공기를 흔드니 파고다 공원 안팎에서 빙빙 돌던 약 500명의 학생들은 공원 안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섰다.
별안간 팔각정 위에서 선언서가 사방으로 뿌려지며 어떤 사각모자를 쓴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탑동공원은 온통 수라장이 되면서 정문을 나서서 수십 명씩 종대의 시위행렬은 종로 네거리를 향하여 전진하여 나갔다. 좌우 길 옆에는 고종황제의 인산 구경을 하려고 시골서 올라온 백립(白笠)을 쓴 백의동포 수십만 명이 거리에 꽉 차 있었다. 그때 필자도 선두에서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부르며 전진하여 나갔다.

그해 기미년 3월 1일은 일기도 따뜻하였지만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시위대들은 학생복 윗저고리를 벗어서 휘두르며 목에서 피가 튀어나올 정도로 만세를 고창하면서 지금 동아일보사가 있는 황토현을 향하여 나간다. 이때 연도 좌우에 있던 백립을 쓴 군중도 자꾸자꾸 시위대에 가담하여 시위군중은 무려 수만이 되었다. 이때 좌편에는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병 천여 명이 완전무장을 하고 시위대를 따르고 우편에는 일 순사가 수백 명이 따른다. 그러나 시위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황토현에 이른 시위 행렬의 주력은 그대로 서대문을 향하여 전진하고 주력에서 갈라진 행렬은 경복궁 광화문을 향하여 나가며 독립만세 소리는 더욱 고조되었다.
우리 주력 행렬은 서대문을 나서서 합동(蛤洞)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에 이르렀다. 프랑스 영사를 만나 독립만세를 부르는 뜻과 선언서를 전하려 하였으나 일경의 제재로 영사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발을 돌렸다. 서대문 고개를 넘어 덕수궁 대한문 앞 경성부청 광장에 이르러 열광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가다 수십 명의 시위자들은 대한문의 경비선을 뚫고 덕수궁 안으로 수백 미터쯤 뛰어들어 갔으나 일 헌병과 충돌하여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으로 다만 우리의 주장만을 외치는 우리들은 일 헌병의 장검 앞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황제 인산일을 앞두고 대한문 앞으로 모여든 인파

우리들은 다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만세와 열화 같은 연설, 고종황제의 독해(毒害)를 슬퍼하는 통곡으로 한 시간 동안 시위를 하다가 다시 선두는 소공동 조선 호텔과 한국은행 앞을 지나 그때 왜놈들의 집단주거지인 본정(本町, 지금의 충무로)으로 들어섰다. 좌우의 일본인 상점들은 굳게 문을 닫고 일본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우리의 시위행렬은 수천수만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왜성대(倭城臺) 소위 조선총독부 근처까지 갔을 때 일제의 군경들은 총칼을 들고 돌격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우리 군중 앞으로 달려와서 선두에 나아가던 우리 학생들을 마구 칼로 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십 명의 애국 학생이 만세 부르는 팔이 잘리고 귀가 떨어지고 종래는 붉은 피를 흘리고 땅에 쓰러져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시위대는 여기에서 해산이 되었다.
나는 중국 영사관 앞으로 빠져서 식산은행과 무교동, 청진동을 거쳐 안국동 천도교 중앙총부 앞을 지나 가회동 집에 돌아오니 (당시 춘암 대도주장 댁) 일경들이 와서 수색을 하고 갔는데 온통 난장판이다. 목은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편 탑동공원에서 청년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결행하는 때를 같이하여 손병희 선생 이하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 만세삼창으로 독립선언식을 행하고 간단한 축배를 들다가 달려온 일경에게 체포되어 자동차로 노도같이 흥분된 만세 군중에게 손을 흔들며 소위 왜놈의 경시청으로 향하여 즉각 투옥되었다.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며 시위의 선두에 나선 사람은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정지용 등 4용사였다.

이종일 선생이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한 <독립선언서>

3월 3일은 고종황제의 인산을 치른 뒤 만세 시위는 5일부터 다시 시작되어 남대문 역전에서 강기덕, 김원벽은 약 2, 3천 명의 군중과) 같이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게 붙들려 가고, 매일같이 북악산 남산, 인왕산 봉우리에는 태극기가 꽂히고 산에는 봉화를 올려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3월 10일 드디어 천도교중앙총부에 검거 바람이 일어 박춘암(인호) 대도주를 시작으로 하여 중요 간부들이 경시청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은 후 박춘암 대도주와 금융관장 노헌용 두 분은 33인과 함께 서대문감옥으로 행하고, 기타 간부는 다 석방되었는데, 춘암 대도주께서는 의암성사(손병희)의 명에 의하여 노헌용에게 명하여 돈 5천 원을 최린에게 주었는데, 그것이 독립운동 자금에 쓰이는 것인 줄을 알면서 주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중략)

원래 기독교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하여 한국 독립 청원서를 내자고 하였는데, 의암 손 선생께서 독립은 선언하는 것이지, 청원 독립이 어디 있느냐면서 최린으로 하여금 기독교 측을 설득케 하였다. 이에 기독교 측의 이승훈 선생은 천도교 측 최린 씨에게 운동자금으로 3천 원을 요구하였는데 이 요청을 손의암 선생에게 고하니 손의암 말씀이 “이 사람이 3천 원으로 무엇을 하겠나 아주 5천 원을 춘암 대도주에게 달라 하여 갖다 주어라.” 하시었다.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공판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자금 5천 원을 기독교 측에 공급한 관계로 천도교의 춘암 대도주 이하 간부 전부가 피검되었으나 일 개월 만에 다 풀려나오고 춘암 대도주와 노헌용 씨만 48인의 3·1운동 주동자로서 46인과 같이 1920년 7월 13일 공판을 개정하고,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일, 이인환(이승훈), 한용운은 징역 3년, 이갑성 (중략) 백상규(백용성) 각 1년 6개월, 길선주는 무죄, 양한묵은 옥사, 함태영 3년, 최남선 2년 6개월, 함기덕, 김원벽 징역 2년, 이경섭은 징역 1년 6월, 박인호, 노헌용, 송진우, 현상윤, 정노식, 김도태, 임규, 안세환, 김지환, 심세환 각 무죄, 이상과 같이 공판 판결이 났는데, 이 공판에 방청권을 얻으려고 경성지방법원 정문 앞에는 전일부터 수천 명이 모여들어 밤을 새우며 7월 13일 아침에야 순서대로 나눠 주는 표는 겨우 150장이었다.

나도 한 장 얻어가지고 정동 복심법원으로 뛰어갔다. 몸수색을 당하고 법정 안에 들어가니 경계가 삼엄하였다. 조금 후에 피고인 48인이 차례로 들어오시는데 용수를 쓰고 출정을 하니 용수를 벗기 전에는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피고석에 피고인 전원이 착석한 뒤에 용수를 다 벗었는데 의암성사를 제외하고는 다들 건강한 모습이었다.

48인 민족대표들이 서대문감옥에 계실 때에는 의암성사댁과 춘암상사댁 외에는 거의 다 감옥 앞 광장에 천막을 치고 큰솥에다 밥을 짓고 반찬을 장만하여 찬합에다 정성껏 담아서 하루 세끼를 각각 들여가는데, 이곳도3·1운동 때에 전무후무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천도교회에서는 천도교 측 민족대표 15명에는 물론이고 기독교 측 16명과 불교 측 대표 두 분에게도 식사 차입대를 일률적으로 보조하였다. 그때 나는 매일같이 서대문감옥 앞에 가서 이것저것 도와드리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나는 박래홍, 이세헌, 안상덕, 이병헌, 정광조, 최준모, 김상규, 이태운 등 수십 명이 수감되어 있는 서대문감옥의 두 길이 넘는 담 밖에서 선생님들이 그 안에 미결감 3익(益) 독방에서 긴 나날을 건강하시고 그분들이 선언한 조선 독립이 하루바삐 성취되기를 한울님께 기원하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양한묵 선생이 간밤에 급사하였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들은 모두 경악하고 양지강장(梁芝江長)의 장자가 들어가서 알아보니 사실이라, 격분한 나머지 감옥 전옥실(지금의 소장실)의 책상과 의자를 때려 부수고 나왔다. 그러나 별수 없이 시신을 인수하여 가지고 돌아오는데 그 아들 재규(在珪)는 인력거를 타고 상여를 모시고 계동 자택으로 오는 도중 종로 네거리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연속 미친 듯이 부르며 와도 경찰이 간섭하지 않고 연도의 시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나도 줄곧 뒤따라 계동 자책까지 가서 곧 세브란스 병원장 미국인을 청하여다가 검시를 하였는데, 약사(藥死)가 아니고 뇌일혈이 분명하다고 하여 곧 고향인 전남 화순 선영에 안장하였다.

박래원 1902년 11월 3일 출생. 1917년 보성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동인쇄소 견습공으로 일했다. 3·1운동 후 YMCA에서 2년간 영어를 수학하였고, 청년회중앙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1년 문선공으로 인쇄공노조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5월 화요회 소속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청년회의 지시로 서울인쇄직공청년동맹, 8월에는 경성노동연맹을 조직하고 11월 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고 12월 화요회가 주도하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자 노동총동맹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천도교 청년 대표로 추천되어 6.10만세운동을 추진, 권오설 민창식 등과 함께 조직과 연락을 담당하고 유인물을 인쇄하다가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9년 12월 출옥 후에는 천도교청년동맹 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집행위원/상무, 조선노동사 서무부장/재무부장, 청우당 대표위원, 청년회 중앙간사, 중앙총부 감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가평에 은거하여 탄압을 피하였고 광복이 되자 천도교보국당 조직부장, 만화회 총무부장을 지냈다. 6.25전쟁때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환도하여 경운동에서 화원을 경영하면서 보국연맹조직부장, 종의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였으며,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검거되어 징역 5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63년 12월 특사로 6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그 후에 선도사, 서울교구 감사장, 선도사, 재단 상무이사, 종법사, 서울교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8년 2월 17일 환원하였다.

1 thought on “내가 겪은 기미년 3월 1일 / 박래원”

  1.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타베이스의 신문조서와 국가기록원 소장 판결문등를 모아 보면 알려진 교과서적 3.1운동사와 일본인이 만든 계보도, 파고다공원 선언서 낭독자가 다름을 알수 있었습니다.
    학생독립운동이 민족대표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학생독자적 선언서와 선포계획이 따로 있었으며 박희도가 김원벽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며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하여 학생 독립선언서는 소각하고 3월1일 선언식에 참여 돕기로하나 김형기 윤자영을 중심한 학생대표의 대부분이 선포식 이후 시위를 결행키로 하여 박희도는 이 사실을 2월 28일 민족대표모임에 보고함으로서 장소를 명월관으로 옮겼고 김형기등은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감행하게 된 것이다.
    이래서 민족대표의 판결과 학생대표의 판결이 따로 이루어 지고 학생대표의 판결문(판결문 548-549쪽)에 김형기 윤자영은 1년의 형을 선고 받았으며 그 판결이유에 “김형기 윤자영등은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손병희등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천인의 군중은 열광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경성부내를 광분” 라 판시하여 경성의전 대표였던 金炯璣가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 낭독자임을 적시하고있으나 100주년이 된 오늘까지 이를 가려내지 못하고 있다.
    김형기가 선언서를 낭독한 것은 분명하며 이 내용의 본인이 출력한 100여명의 당시 신문조서와 판결문을 열람하고 작성 한 것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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