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1운동|해외에서의 3.1운동

온 나라를 휩쓴 3·1운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 민족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 울려 퍼진 3·1운동의 함성이 세계 어디서 어떻게 울렸는지 사학자에게 듣는다.
글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인문대학장)

 

1914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의 미국독립기념관 앞에서 개최된 한인대회에 참석한 각 지역 대표들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과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1918년 11월 11일)과 함께 국제무대에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 미국에서의 소약국회의(제2차 약소민족동맹회의) 개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민족자결주의 선언, 러시아혁명의 성공 등 세계 개조의 물결이 몰려왔다.

한국민들 사이에서는 독립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미국 등 서구 열강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이라는 낙관주의도 크게 작용하였다.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일제의 독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널리 유포되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고종황제에 대한 추모와 반일 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긴 것은 상하이 신한청년당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인 11월 중순, 미국 대통령 윌슨의 중국 특사인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를 방문하였다. 그는 중국측이 주선한 환영회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파리강화회의에서 패전 후의 식민지 처리 원칙으로 논의될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크레인의 이 연설을 접한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국내 각지로 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를, 만주와 러시아로 여운형을, 일본으로 장덕수·이광수를 파견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파견 대표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일본을 의식하여 이들 대표들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12월 13일 뉴욕에서 개최된 제2차 약소민족동맹회의에는 신한협회의 대표로 김헌식,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정한경과 민찬호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모든 약소민족들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정과 독립자금의 모집 등이 추진되었다. 러시아 한인의 중앙기관인 전로한족중앙총회는 파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윤해와 고창일을 선정하였고, 이들은 1919년 2월 5일 ‘한인총대표’라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된 증명서를 소지하고 니콜스크-우수리스크를 떠났다.

도쿄 조선독립청년단의 2·8독립선언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 클로니클>의 보도를 통하여 재미 한인들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소식과 약소민족동맹회의 결의 사항을 알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이 파견한 조소앙과 장덕수가 도쿄에 도착하여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궐기를 고취하였고, 뒤따라 온 이광수가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1월 말 독립선언서를 갖고 서울에 도착한 송계백은 최린, 현상윤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전하였다.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결의문’ 그리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가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일본 각지 신문사와 잡지사, 여러 학자들에게 발송되었다.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600명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였는데, 실행위원 등 27명이 체포되었다. 재일 한국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이후에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국내외 각 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리하여 국내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를 필두로, 러시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의 ‘대한독립선언서’, 북간도에서 ‘간도거류조선민족 일동’으로 발표된 ‘독립선언 포고문’, 만주 길림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의군부가 주도한 해외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서·북간도의 3·1운동

중국의 서·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미국·하와이·멕시코에서 국내의 3·1운동에 부응하여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북간도에서는 원래 러시아 한인의 최고 중앙기관인 전로한족중앙총회의 주최로 1919년 2월 25일에 개최된 노중령독립운동단체대표회의의 결정을 기다려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3월 7일 국내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독립선언 축하식을 서둘러 진행하였다. 3월 13일 정오 12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룽징촌 북쪽의 서전벌에서 명동학교, 정동학교, 대성학교, 동흥학교, 은진중학교 등의 학생들과 일반 동포 약 3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대회장 김영학이 ‘간도거류 조선민족 일동’ 명의로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하였고,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천지가 진동하도록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회에 참석한 군중들은 일본 총영사관이 있는 룽징 시내로 행진을 하였다. 맨 선두에는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320명의 충렬대가 ‘대한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나섰다. 그 다음으로 북과 나팔을 멘 악대가 따랐으며 수많은 군중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압력과 개입을 두려워 한 중국당국은 멍푸더를 총지휘관으로 한 군경을 룽징으로 파견하였다. 멍푸더는 일본 총영사관을 향해 행진하던 시위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림으로써 17명이 희생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들 3·13시위운동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3월 17일 5천여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이렇게 시작된 북간도에서의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은 옌지현, 허룽현, 왕칭현, 훈춘현, 둥닝현의 각처에서 4월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총 54회의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101,470명에 달하였다.

서간도 지역에도 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져서 3월 12일류허현 삼원포에서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200여 명의 한인들이 독립선언 경축대회를 개최하였다. 같은 날 퉁화현에서도 한인 300여 명이 금두화락 교회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퉁화현에서는 3월 20일까지 만세시위운동이 계속되었다. 백두산 동쪽의 안투현, 푸쑹현, 창바이현, 지안현, 환런현 등지에서도 ‘독립선언 축하식’과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13일 간도 용정 한인들이 낭독한 ‘독립선언 포고문’
러시아 연해주의 3·1운동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전로한족중앙총회 주도로 2월 25일부터 3월초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노중령독립운동 단체대표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러시아 각지와 북간도, 서간도는 물론, 국내 대표들도 참여하였다. 대회는 독립선언서의 발표, 시위운동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고 임시정부적 중앙기관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3월 8일 국내로부터 온 동포들에 의하여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졌다. 당초 대한국민의회는 3월 15일 독립선언식과 가두시위운동을 러시아 당국의 공식 허가를 받아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당국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
던 일본정부의 압력을 받아 계엄령을 발포하고 국민의회와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회에 대하여 폐쇄령을 내렸다. 아울러 일본과의 국교관계를 해치는 일체의 행위를 엄금하겠다는 명령도 내렸다.

러시아당국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3월 17일 오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하였다.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와서 독립 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날 한인 상점과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오후 3시 한인청년들은 일본 총영사관을 찾아가 러시아어와 한글로 작성된 대한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전달해 달라는 요청서와 함께 전하였다. 이와 동시에 11개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공서에도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오후 4시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되었으며,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2만여 명의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한인들은 대로로 진출하여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해가 저문 오후 6시부터는 문창범의 지휘로 청년,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서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에 나눠 타고는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과감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총영사는 러시아 연해주 군사령관과 주(州)장관에게 문창범의 체포와 시위운동 금지를 요구하였다. 오후 7시 반에 이르러 러시아 관헌들이 시위를 금지하면서 시위학생들을 체포하고 신한촌의 태극기를 모두 끌어내리게 하였다. 일본과 러시아 당국의 탄압에 항거하여 다음날인 3월 18일 한인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사할린에서는 3월 16일에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스파스크(3월 18일), 라즈돌리노예(3월 21일), 그리고 하바로브스크, 노보시키예프스크 등지에서도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4월 5일에는 두만강 하구의 녹도(크라스노예 셀로)에서, 4월 9일에는 구사평에서 시위운동이일어났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3월 9일 상하이의 현순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앞으로 전보를 보내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안창호는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 이승만과 정한경에게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영자 신문에도 현순의 전보 복사문을 돌렸다. 저녁 7시 30분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3·1독립선언 소식을 접한 한인들이 모여 만세를 열창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도 현순의 전보를 받고 한인교회에 한인 6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필라델피아의 리틀 극장에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한인자유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 Liberty Congress)가 개최되었다. 한인 120여 명이 참석하고 미국인 목사, 신부, 유대교 랍비, 대학총장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의 목적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려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향한 한국 민족의 요청에 동정과 지지를 표시하였으며 폭군적인 일본의 동기와 행위들을 규탄하였다. 이들은 미국적인 민주주의, 자유, 기독교의 가치를 칭송하며, 미국이 정의와 자유를 얻은 승리자로서 한국을 도울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인대표들은 ‘미국에의 호소문’을 채택하였는데, 국내에있는 1천 8백만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자임하였다. 호소문에서 ‘미국인들 역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기독교 사상과 인류애의 편에서 정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지와 동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기마대와 악단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여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조인된 독립관에 집결하였다. ‘대한공화국임시정부’ ‘국무경’의 자격으로 이승만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서명했던 헨콕이 앉았던 자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서 독립관장의 환영사를 들었으며, 영문으로 된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3·1운동 후 한국민들 사이에서는 평화적 운동만으로는 독립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국내의 3·1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점차 진정되었지만,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1919년 3월 말에서 4월 초부터 무장투쟁을 위한 자금과 청장년 모집, 독립군부대 조직에 착수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청년과 학생들 역시 대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미주 지역에 배포된 독립선언서 필사본과 리플렛
1919년 4월 12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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