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주년 몽양을 떠올리다| 3·1 운동 100주년에 생각하는 손병희, 안창호, 여운형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 늙은 나이에 이르도록 언제나 듣는 소리가 있다. 왜 우리에게는 품이 넓고 넉넉한 지도자가 없느냐는 소리다. 정말 그런 분들이 안계서 하는 말인지 계신 분들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돌아가시도록 해서 하는 말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3·1운동 얘기가 나오면 듣는 소리는 손병희 선생에 관한 것이다. 크게 보시고 계획을 세우신다는 것이었다. 미리 적소(適所)에 쓸 인재를 골라서 양성하고 적시(適時)에 쓰셨다고 한다. 일을 함에 사람을 믿고 재물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나라를 찾는 일에는 내 종교,네 종교를 따지지 않고 함께 취의(聚義)하셨다고 한다. 당시 천도교가 동학운동으로오체가 잘려 나가는 참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성 교도들이 있어 어느 종교보다 재정에 여유가 있었다고 했다. 열성은 있었으나 재정이 따르지 못했던 개신교 측에 거사를 앞두고 거금을 쾌척했다. 이 얘기는 3·1 운동 이래 종교계에서 종교의 울타리를 따져 좁은 이기심에 안주하려 할 때마다 나오던 일화였다. 의암 선생의 금도(襟度)에 힘입어 3.1운동이 여러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1운동의 대대적인 거사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해내외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던 이승만 박사는 상해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당초 임시정부의 체제는 국무령 산하에 각부가 있고 임시의정원(의회)과 함께 운영하게 되어 있었다. 상해에 오지 않고 대통령 체제를 요구한 이승만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민주공화정을 채택했지만 반상(班常) 의식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기호니 영남이니 서북이니 지역색이 남아있는 가운데 정부를 영국식 의원내각제로 운영해야 통합성이 높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연방제인 미국의 대통령제를 고집한 이승만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초기의 분열과 위기를 수습한 분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었다.

안창호는 소련의 사회주의를 임시정부의 주도이념으로 채택하자는 이동휘 세력과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자는 이승만 세력의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무력화되자 양자를 화해 타협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미 임시정부 초기부터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과 이동휘 두 사람은 초기 임시정부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떠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 1919년 11월 일제가 외무차장이었던 젊은 몽양 여운형을 일본 수도 도쿄로 초청했다. 독립하려는 조선인들의 취지를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는 임시정부 내부를 분열시 키려고 한 것이었고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처럼 일본제국도 자치를 허용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임시정부 안에서는 몽양 여운형의 도쿄행을 반대하는 주장,특히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반대 주장이 거셌다. 독립운동가가 일제의 초청을 받아 적국의 수도에 간다는 사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젊은 후배가 임시정부의 대표 격으로 일제의 수도에 간다는 것이 수용될 수 없었다. 이때 몽양의 도쿄행을 지지하고 나선 사람이 도산 안창호였다. 도산은 몽양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보낸 사실,신한청년당 조직을 통해 도쿄유학생 2·8독립선언을 성사시킨 과정,국내로 들여보내 3·1 운동에 불씨를 붙인 사실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몽양의 그릇을 알고 있었던 도산은 도쿄에 몽양이 가서 큰일을 벌일 것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산의 예상은 적중했다. 몽양은 일제 고관을 모아놓고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설파했다. 그여파로 일본 정계에 파란이 일어났다.

도산과 몽양은 비슷한 역정을 걸었다. 1929년 상해에서 몽양이 먼저 일제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서 출소했다. 도산도 1932년에 상해에서 체포되어 1936년 대전형무소에서 출소했다. 도산이 출소하던 날,몽양과 고당 조만식이 그를 맞으러 갔다. 도산은 국내로 압송당하기 전까지 임시정부를 바로 세우려고,화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고문과 병고로 1938년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여기서 ‘만약’을 생각하게 된다. 도산 안창호가 1945년 이후에 생존했더라면 우리 해방정국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미국의 교민사회 안에서 이승만보다 더 깊은 신망을 받았던 도산이 있었더라면 미군정이 쉽게 이승만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산은 임시정부 초기부터 몽양에 대해 정치력과 실천력,그리고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두 분은 김규식과 함께 합작을 도모했을 것이다. 도산이 있었으면 뒤이어 귀국한 임시정부 본대 백범 김구와의 교감도 깊어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방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보려고,비록 외국군의 신탁통치를 받더라도 그 치하에서 하나의 정부를 세워보고자 좌우합작을 시도했던 몽양 여운형의 비극을 살펴본다. 그는 3·1운동 이전부터 뜻을 함께해온 선배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고 미소 군정 당국자들과 협의하면서 지뢰밭을 걸었다. 좌우 양측으로부터 12차례 테러를 당한 끝에 암살당했다. 다시 ‘만약’을 말해본다. 만약 백범 김구가 몽양과 우사의 초기 좌우합작위원회에 함께 했더라면 이승만과 한민당은 감히 분단 정부 수립을 꿈꾸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범과 몽양의 합작 세력은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3·1운동 때나 지금이나 품 넓은 분들이 그리워

몽양의 좌우합작이 실패로 돌아간 뒤,눈앞에 닥친 단독정부수립 그리고 분단과 전쟁 위기 앞에 백범이 나서보지만 가파른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역사의 바윗덩이를 막을 길이 없었다. 늦은 것이다. 전쟁을 치르고 휴전이 성립된 뒤,죽산 조봉암이 평화통일론을 앞세우고 선배들의 뒤를 잇는다. 그 역시 이승만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여기서 다시 ‘만약’을 말해본다. 죽산 조봉암이 사형을 당하지 않은 채 만약 4·19를 맞았다면,4·19 이후에 진보 세력이 무정부 상태로 분열의 극으로 치달았을까. 질서정연하게 온건한 남북관계 정책을 내세웠다면 민주당도 그냥 정권이 자신들에게 굴러들어올 것으로 낙관하지 못하고 긴장했을 것이다. 박정희 등 군부 쿠데타 음모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가 죽이지 못해서 안달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우리 손으로 죽였다. 될수록 민족의 분열을 막으려고 애썼던,품이 넓었던 아까운 지도자들을 우리 손으로 죽였다. 그들이 정작 우리 손에 쓰러져가는 것을 지켜본 일제의 가해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너희 자신들이 하는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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