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천도교계 대모 주옥경 선생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사회적 책무를 자각하다

기생학교는 교양 있는 말씨,예의범절,한문,서화,기예 등 모든 면을 가르쳤다. 모든 면에서 월등했던 주옥경은 19세가 되었을 때 서울 명월관에서 무부기조합(無夫技組合)을 조직하고 기생의 변화를 주도하면서 더욱 주목받는다. 더 나아가 주옥경의 활동은 1907년을 전후로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과 일제의 경제침탈,그리고 민중저항운동의 흐름 속에 기생의 사회적 책무 자각이라는 사회 변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주옥경이 14세였던 1907년에는 1,300만 원의 국채를 갚지 못해 국가 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고 민족 생존권을 잃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펼쳐진 의연금 모금활동이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기생의 의연금 쾌척은 특히나 주목받았다.

대구 남일동폐지부인회와 기생 앵무의 의연활동을 시작으로 진주애국부인회,평양기생18인회,의령군퇴기20명회,약방기생,궁내부 기녀 등 기생의 의연활동은 이어졌다. 이후 1913년 주옥경이 활동한 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대한제국 고관을 역임했던 이들과 친일파 인물들,지식인이 찾았던 명월관에서 주옥경은 손병희 선생과 인연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 천도교에 입문했다. 스승처럼 존경했던 손병희 선생이 전국의 천도교 조직망을 통해서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3·1운동에 참여,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주옥경은 옥바라지를 자처했다. 모진 고문으로 병세가 악화되자 손병희 선생은 1920년 10월 22일에 병보석이 허가되었지만 1921년 4월 19일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390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에 실린 주산월의 기사 (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공간의 경계를 넘어 의로움을 펼치다

존경하는 손병희 선생과 독립의 뜻을 함께 펼쳤던 주옥경은 독립운동과 함께 천도교 전파의 길에 뛰어든다. 주옥경은 1924년 3월 31일 손광화,김우경과 함께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을 조직하고 전국적인 여성조직을 출범시켰다. 여성의 주체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그는 여성해방동맹(女性解放同盟)을 조직한 뒤,1927년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 도전은 여성문맹타파,생활개선,의식변화를 통해 남녀 차별 없이 평등하게 뜻을 실천하는 종교의 길을 선택한 것이 었다.

“나는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나이는 이미 사십을 바라보게 된 때였다. 그러나 죽어서라도 배워야겠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오늘날까지 오는 데 유형무형의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돌아가신 손 선생이요,앞으로 그 뜻을 받들어 한평생을 천도교에 바치는 동시에 조선 사회를 위해 미약하나마 도우려고 합니다….”

1914년 매일신보사(每日新報報)에 실린 손병희와 주산월의 기사(출처:국립중앙도서)

3·1운동이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은 주옥경으로 하여금 주체의식 회복을 통해 민족구성원의 자존감 확보와 책무자각이 주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다. 천도교를 통해서 여성계몽을 이끌며 천도교의 대모가 되었던 주옥경! 1931년 천도교 내성단 대표,1946년 천도교내수회 회장,1956년 천도교부인회 회장 등을 거쳐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회장,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천도교를 이끄는 선두적인 여성이 되었다. 기생,독립운동,신여성,종교인 등 많은 수식어가 그를 지칭하고 있지만 사회인식을 변화시켰던 것은 기생으로 활동했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일본 관리들이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가장경계했던 주요대상이 기생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수많은 지식인과 교류했던 공간에서 기생은 언제든지 독립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의기(義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눈과 시대정신을 가슴에 담았던 주옥경 선생을 통해서 의로움이 기억되는 역사의 한 자락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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