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야기| 3·1운동과 무인멸왜기도운동

염상철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전 천도교 종의원 의장

3·1독립운동은 천도교,기독교,불교라는 종교가 연합을 하고,전민족의 의지가 결집하여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합병한 이후 정치단체,사회단체를 모두 없애버리고,종교단체와 교육단체만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종교단체와 교육단체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특히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으로,조정으로부터 이단(異端)으로 지목받고 탄압을 받아왔다. 조정의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교조신원운동,갑오동학혁명,갑진 개혁운동 등을 일으키며 지속적으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노력을 해왔다.

우리나라는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종교의 자유를 조금씩 허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상을 잘 읽어 낸 의암 손병희 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하고 등록하므로,탄압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일제의 강제합방 이후 정치단체와 사회단체를 없애버릴 때 천도교는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남아 있을 수 있었으며 3·1독립운동을 기획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천도교는 강제합방 이후 서울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500명 가까운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종교적인 수련을 시켜,훗날 삼일운동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고,보성사 등을 세워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바탕을 삼기도 하였다. 또한 기독교와 불교를 연합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을 이끄는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천도교를 탄압하기도 하고,회유로 분열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1930년대에 이르러 만주를 유린한 일제는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하여 더욱 가혹한 식민통치를 심화시켜 나갔다. 우리말,우리글조차도 쓰지 못하게 하였고,이 시기를 기점으로 1940년대에 이르러 강요되던 신사참배,황국신민화,심지어는 창씨개명까지 강요하는 민족말살정책이 그극을 이루었다.

이러한 때에 천도교는 비밀리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제의 패망과 우리나라의 독립을 기원하는 멸왜기도와 유사시를 대비한 독립운동자금으로 특별성금을 모금하였다. 이는 중일전쟁 후,이 전쟁으로 인하여 주권을 회복할 기회가 포착될 것으로 믿고 펼쳤던 종교적 기원을 담은 독립운동이 었다.

그러던 중 1938년 무인년 2월 17일 이 사실이 황해도 신천 경찰서에 적발되어 전국적으로 교역자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당시 신문들은 ‘극비의 불온계획’,‘조선독립을 몽상’,‘천도교의 대 음모’,‘특별희사금도 모금’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의 보도를 접한 당시 우리 민족은 ‘이 혹독한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도 천도교는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한 가닥 독립에의 희망을 다시 찾게 되었다.

무인멸왜기도운동은 3.1독립운동 이후,날로 교활해진 일제의 탄압 속에서 3.1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되살린 독립운동이다. 나아가 일제 말기에 아무런 희망조차 갖지 못한 채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던 1938년 당시 우리 민족에게, 아직 우리에게는 민족혼이 살아 있으며,이 민족혼이 독립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새로운 각성과 희망을 준 중요한 천도교의 또 다른 독립운동이 었다.

오늘 3·1운동 100년을 맞아,우리는 3·1운동의 정신과 함께 이 정신을 이어받은 무인멸왜기도운동의 정신 또한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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